본문
- 2025.11.13 | by 배정민
-
22
0
- 2025.11.13 | by 배정민
-
22
0
오늘날 우리는 백반증을 피부의 멜라닌세포가 소실되어 나타나는 자가면역질환으로 이해하며, 과학적 연구방법론에 기반하여 새로운 치료법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250여 년 전, 건국의 열망과 노예제라는 모순이 공존하던 18세기 미국에서 백반증은 의학적 질환이 아닌,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피부색이 곧 한 사람의 운명이자 사회적 신분을 결정짓던 그 시절, 검은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현상은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미스터리이자, 당대 지식인들의 격렬한 논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었기 때문이죠.
'하얀 흑인'이라 불린 남자, 헨리 모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헨리 모스(Henry Moss)라는 한 남자로부터 비롯됩니다. 버지니아 태생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38세 무렵 손에서부터 시작된 백반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4년 뒤인 1796년, 그의 나이 42세에 필라델피아의 선술집에서 자신의 몸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이름은 곧 토머스 제퍼슨이나 존 애덤스만큼이나 유명해졌고, 그의 몸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인종의 기원과 의미를 논하는 살아있는 탐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논쟁을 주도했던 인물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저명한 의사였던 벤자민 러시(Benjamin Rush)였습니다. 그는 흑인의 검은 피부가 일종의 나병이며, 헨리 모스의 백반증은 그 병이 '치유'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시각에서 흰 피부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상태였으며, 검은 피부는 교정되어야 할 질병이었으니까요.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다른 흑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혈이나 설사 유도와 같은 위험한 의료 행위를 제안하기까지 했습니다.
한편 또 다른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던 새뮤얼 스탠호프 스미스(Samuel Stanhope Smith)는 헨리 모스의 사례를 피부색이 환경적 요인에 의해 변할 수 있다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증거로 삼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흑인과 백인이 결국 같은 인류라는 점을 시사하며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그 기저에는 백인성을 기준으로 인간의 우열을 가리던 시대의 깊은 무지와 인종차별적 편견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헨리 모스는 동등한 인격체가 아닌, 자신들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기이한 현상이자 연구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죠.
구경거리와 예술 작품, 또 다른 시선들
헨리 모스의 사례가 철학적, 의학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면, 또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었습니다. 1736년 콜롬비아에서 태어난 메리 사비나(Mary Sabina)는 몸 곳곳에 흰 반점을 가진 부분백색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초상화는 그녀를 거의 나신으로 묘사했으며, 마치 관람객에게 자신의 피부를 직접 확인해보라는 듯 가슴의 흰 반점을 가리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복제되어 대서양을 건넜고,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구경거리이자 문화 상품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다. 이처럼 백반증, 백색증, 부분백색증을 가진 이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의 시선 속에서 기이한 구경거리, 철학적 논쟁거리, 혹은 예술적 감상 대상으로 해석되고 소비되었습니다.
무지와 편견을 넘어, 과학과 공감의 시대로
수 세기가 흐른 지금, 우리는 백반증을 가진 이들을 더 이상 호기심과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헨리 모스의 사례를 통해 피부 질환이라는 의학적 현상이 어떻게 시대의 편견과 무지를 통해 왜곡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기도 했습니다. 18세기 미국 지성인들의 '과학적' 탐구는 객관적 진실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백인은 우월하고 흑인은 열등하다'는 사회적 합의를 어떻게든 유지하고 설명하려는 몸부림에 가깝다는 것 또한 목격했습니다. 이제 많은 의사와 연구자들은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효과적인 색소회복을 돕기 위해 세포 수준의 기전을 연구합니다. 때문에 과거의 기록을 되짚는 일은, 우리가 질병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그리고 한때 만연했던 무지와 차별을 넘어 과학과 공감의 시대로 나아온 여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백반증은 이제 한 개인의 삶을 규정하는 낙인이 아닌, 의학적 도움과 사회적 지지를 통해 충분히 관리하고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질환으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참고문헌
Craiglow BG. Vitiligo in Early American History: The Case of Henry Moss. Arch Dermatol (2008).
Odumosu T. Burthened Bodies: the image and cultural work of “White Negroes” in the eighteenth century Atlantic world. American Studies in Scandinavia (2014).
Martin CD. The White African American Body: A Cultural and Literary Exploration. Rutgers University Press (2002).
Curran AS. The Anatomy of Blackness: Science & Slavery in an Age of Enlightenment.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1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구독하기
힐링백반증 구독하기



